올 여름 휴가는 친정에서 길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남편의 여름휴가와 작은 아이의 어린이집 방학 기간까지 붙여 2주간 있게 되었죠. 휴가가 기대한 것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하루 들른 고성에서 휴대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남은 1.5주를 반강제적인 휴대폰 없는 생활로 지내야했고, 그로 인해 몇가지 골치아픈 꼬인 일들이 발생했고, 돌아오기 며칠 전에는 밤 중에 지네에 물려 시골집에 대한 낭만이 잠시 사그러들기도 했죠. 

수도권의 여름은 찜통같다했지만 다행히 친정은 남해바다와 인접하고 지리산 가까이에 위치해서 아주 덥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더운 한낮에는 그 흔하던 모기도 숨어있어서 마루에 발담그고 앉아있으면 이런 천국은 따로 없다고 느낄 정도였지요. 하지만 한낮의 운전은 아무리 빵빵하게 에어콘을 틀어도 너무 힘이 들었어요. 숨이 턱 막혔죠.

휴가에 대한 원래의 포부는, 시골에 가니 가능한 플라스틱 없이 살아보자였습니다. 하지만 친정임에도 제 집은 아니고, 이 공간에 손님으로 오다보니 최선을 다하는 걸로 만족하게 되나봅니다. 외출 시에는 항상 텀블러와 장바구니를 가져갔고, 친정엄마를 위해 면사로 뜬 수세미와 네트백도 선물로 드렸죠. 

그리고 휴가 도중에 만난 반가운 소식. 환경부가 일회용 플라스틱컵 남용에 대한 본격적인 단속을 실시하면서 제가 방문한 프랜차이즈점들은 뭔가모를 긴장감이 많이 느껴졌어요. 수도에서 먼 남쪽 지방이었지만 소규모 점포에도 일회용컵 사용을 자제해달라는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었고, 어색하지만 유리컵과 머그컵 사용을 물어보는 곳도 꽤 있었구요. 특히 박물관, 과학관 등 공영기관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카페의 경우 텀블러 할인 혜택은 물론이고 아주 잘 된 메뉴얼에 따라 서빙하고 있었죠. 

집에 돌아온 주말은 연휴의 여운에서 허우적거리며, 만사 다 귀찮다는 태도로 보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서야, 이주간의 행적에 대한 소회를 풀고자 합니다.

하나. 곳곳에서 만난 아이디어

저는 모든 사람들, 환경문제에 관심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무의식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친환경적인 습관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선택이나 행동을 한 이유가 본래 환경을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어느 시각에서 보면 다분히 친환경적일 수 있죠. 

가장 먼저 발견한 아이디어는 액체류를 배송할 때 사용하는 비닐뽁뽁이를 화분으로 사용한 휴게소의 어느 가두매장이었어요. 포장재에 물을 담아 들꽃하나 꽂아놓은 것이 어찌나 제 눈에는 시크하게 보이던지. 저 포장재를 많이 사용하는 곳이라면 화분 아이디어를 활용해 최근 유행하는 플랜테리어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어요.

친정집을 가는 길에 시부모님이 여가생활을 즐기고 계시는 경상도 백운산 자락을 들렀어요. 해발 600m 고지의 이곳은 청정 그 자체였죠. 미세먼지 알림앱이 아무리 빨갛고 노랗다하더라도 이 곳은 모든 지수가 한 자리 수의 파랑이었어요. 하늘은 높고 공기는 맑고 시원하고. 장수풍뎅이가 시부모님의 컨테이너 주변에서 놀고 새벽에는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시끄러웠죠. 뻐꾹이, 소쩍새, 딱따구리 등 제가 아는 선에서의 새들은 모두 모아놓은 것 같았어요. 이곳에서의 하룻밤은 몸도 마음도 힐링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시부모님의 아이디어들은 곳곳에 숨어있었어요. 직접 아버님께서 만드신 다양한 나무가구부터, 이 곳에 오실적에 나뒹굴고 있던 물탱크를 샤워장으로 개조하셨구요. 특히 감탄했던 것은 생태화장실이었어요. 상하수도 설치가 안된 이 곳에서 변을 처리하기 위해 아버님은 생태화장실을 만드셨는데, 소변은 따로 모아 요소비료로 사용하시고, 대변은 톱밥으로 덮은 후 땅에 묻어 거름으로 사용하시고 계셨죠. 옛날 푸세식 화장실을 생각해 냄새와 파리를 걱정했는데, 정말로 신기하게도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어요. 투박한 솜씨이나 이렇게 친환경적인 화장실은 처음이라 참 놀랐지요.

친정 아버지도 전문적으로 배운 목수일은 아니지만 뭐든 뚝딱 만드시는데, 오래된 것과 자연의 것을 해치지 않고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금자리를 꾸미셨어요. 녹차나무로 울타리를 세우고, 그 지역 폐벽돌을 실어와 길을 만들고, 그 땅 오랫동안 박혀있던 바위를 살려 쉼터를 만드셨죠. 빠르고 쉬운 방법대신 택한 방법은 투박하지만 든든했고 자연스러웠습니다. 그 곳에서 노는 아이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둘. 언제 어디서나 텀블러, 다회용 빨대, 손수건

소지품이 어쩔 수 없이 많아지는 여행길이지만, 텀블러와 빨대, 손수건은 여행의 필수 아이템이었어요. 텀블러는 냉커피를 오랫동안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정말 좋은 도구였고, 아이들의 남은 음료도 담아갈 수 있었죠. 아이들을 위한 실리콘 빨대 덕에 일회용 빨대를 거부할 수 있었어요. 손수건은 입을 닦고 코를 푸는 용도 외에도 여행 중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요. 즉흥적인 바닥분수 물놀이로 젖은 아이들의 옷을 말리는데 요긴하게 사용했고, 무더위에 적셔 머리위에 올리면 더위도 이겨낼 수 있었어요. 여행 중간에 작은 아이와 제가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적게 가져온 손수건이 아쉽긴 했지만 텀블러와 빨대, 손수건은 제게 필수품이 되어 버린 걸 알 수 있었어요.

고성 공룡박물관 카페는 그 곳 로고를 멋지게 새겨넣은 유리잔에 음료를 담아 나무 쟁반에 담아줬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뻤습니다. 너무 더워 전망대 이 카페까지 아무도 오지를 않아, 저희만 전세 내듯이 쉬었다 왔죠. 고흥 나로우주센터에 갔을 때 텀블러는 더욱 빛났어요. 무려 이곳에서는 개인컵을 가져오면 1천원이나 할인되었거든요!

그리고 항상 가방 깊숙히 넣어다니는 장바구니는 효자노릇을 했는데요. 친정엄마의 장보기에 따라가서도 일회용 봉투 사용을 만류하고 제 장바구니를 이용할 수 있었죠. 가볍고 큰데 튼튼하다는 엄마의 평가에 그 장바구니는 엄마께 드렸고, 간김에 네트백도 하나 떠 드렸습니다.

셋. #2 Minute Beach Clean

이번 여행에서 중요한 일정 중 하나는 물놀이였어요. 남쪽 바다를 가는데 해수욕을 안할 수 없잖아요. 친정 가까이에 계곡도 많답니다. 하지만 2주의 일정 동안 물놀이는 전혀 할 수 없었어요. 해가 너무 강해 오히려 해수욕장엔 사람이 너무 없었고, 반대로 계곡엔 관광객들이 넘쳐났죠. 아이들의 건강과 안전을 이유로 물놀이는 친정 시골집에서만 하는 것으로 결정했죠. 외할아버지는 아이들을 위해 쉼터 크기에 꼭 맞는 풀장을 준비해주셨어요. 근처 계곡물로 채우니 여느 계곡들 부럽지 않은 개인 물놀이장이 완성되었습니다.

여행 중 읽고 있던 책 <No. More. Plastic.>의 저자는 #2minutebeachclean 운동의 창시자이고 바닷가 여행에서 2분만 투자해 플라스틱 쓰레기를 치우길 권장했죠. 저 또한 해양쓰레기의 심각성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올 여름 바다에 간다면 꼭 #2minutebeachclean 운동에 동참하자라고 남편과 얘기했었어요. 유난히 더워 해수욕장 근처도 못간 이 여름에, 저의 첫 실천은 고성 공룡테마파트 안의 상족암에서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덥더라도 공룡발자국은 직접 봐야 한다 생각해 내려갔는데, 절경에 먼저 놀라고, 구석구석의 쓰레기들에 또 한 번 놀랐죠. 그 좁은 곳에, 그리고 우리가 보존해야할 유산인 곳에 왜이렇게 쓰레기가 많은 거죠. 가장 많았던 것은 근처 양식장에서 흘러 들어온 스티로폼 부표였구요. 생수통과 일회용 플라스틱컵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어요. 간혹 맥주패트두요. 이런 곳에 플라스틱 쓰레기가 많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터라, 제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봉투인 아이 기저귀 담는 용도의 지퍼백에 담았는데, 씁쓸하더라구요.  

넷. 시골집의 낭만, 자연놀이

이번 여행에 아이들이 가져온 개인 장난감은 각각 한가지. 큰 아이는 최근에 생일로 받은 미미인형, 작은 아이는 캐릭터페어에서 사준 덤푸 다이제스트였죠. 하지만 아이들은 이 장난감들을 가져온 첫 날 빼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할아버지가 작업 후 땔감으로 모아둔 나무 조각들을 블럭 삼아 가지고 놀았고, 천지에 있는 감나무잎과 마른 대나무 가지로 발을 만들고 놀았죠.

그리고 시골집의 여름밤 백미인 봉숭아꽃 물들이기도 했어요. 저 어릴 적엔 엄마가 손톱에 올린 후 랩으로 감아주셨는데, 비닐과 플라스틱 없는 경험이 되라고 가지고 간 광목천으로 감싸고 면사로 묶어줬죠. 백반을 넣지 않아 색상이 진하진 않았지만 예쁜 색이 나왔습니다.

연휴 속에서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는데, 연휴가 끝나고 보니 그 시간이 참 빨리도 가버리네요. 가장 더울 때를 피해 갔다와서 서울이 그렇게 더웠나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떨어진 듯합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선선한 이 밤이 너무도 소중하네요. 이번 여행은 플라스틱과 일회용에 대해 완벽한 휴가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제 스스로의 약속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었고, 그러한 생활에 익숙해진 제 모습이 많이 대견스러웠습니다.

아이들 돌보느라 당시에는 잘 쉬었다 말하기 어려웠지만, 일상에서 떨어져 새로운 경험과 낭만을 즐긴 것만으로도 생기가 충전되니 좋은 여행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친환경적인 여행이 그리 거창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작은 준비만 필요할 뿐이죠. :)


이건 둘째아이가 식목일에 어린이집에서 심은 토마토에요. 집에서 잘라 준 패트병을 원에서 화분삼아 예쁘게 꾸며서 가지고 왔죠. 확장형 아파트의 아쉬움은 넓은 베란다죠. 저희 집도 빨래 널기에도 비좁은 베란다 한 곳만 있어, 이사왔을 때 발코니에 화분을 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놨어요.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상추를 심어도, 모종을 심어도 잘 자라지 못하고 죽고 말았죠. 식목일에 큰 아이는 상추 씨를 심은 화분을 가져왔는데, 잠깐 싹을 틔우더니 어느날 모두 말라 죽고 말았어요. 매일 물을 주지 못한 엄마의 책임도 있으나 상추를 씨부터 키우는 건 꽤나 어려운 일 같아요.

토마토는 저희 집 환경과 잘 맞았나봐요. 어제까지 큰 비가 내려 걱정이 됐는데, 그 사이 쭈욱 자라서 가지가 휘청거리더라구요. 씻겨내려간 흙을 채우고 토마토가 쓰러지지 말라고 지지대를 해줬어요.

그리고 노란 꽃들 사이에서 작은 알맹이 하나를 발견했어요. 얼마 전 노란 꽃이 피는 것도 신기하더니만 열매까지 생기니 참으로 대견합니다. 저희 아이들은 토마토의 식감을 좋아하지 않아 입 속에 넣어주면 뱉을텐데, 집에서 키운 이 토마토에 대한 반응은 어떨 지 궁금해요.  

만화 <리틀 포레스트>에는 한 여름에 먹는 토마토의 신선함과 달콤함이 잘 묘사되어 있어요.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더운 여름 아삭하게 베어먹는 토마토가 정말 맛있어 보였죠. 올 여름에는 아이들과 설탕 솔솔 뿌린 토마토를 먹을 수 있을까요?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