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더운 토요일이었어요. 두 달 전쯤 사전 예약을 했던 비 존슨 초청 강연이 열리는 날이었죠. 신반포역 근처의 덜위치 컬리지에 도착. 이 곳은 작은 영국이더라구요. 외국인학교라 어느 정도 분위기는 예상했지만 다양한 인종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영어... 참 이국적인 느낌이었죠. 이날은 본교 400주년 기념일인 동시에 서초구에서 개최하는 첫 세계인의 날이라고 해요. 이 작은 영국 내부는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입구에서 간단히 등록을 하고 들어갔더니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나는 쓰레기없이 살기로 했다' 책 판매부스였어요. 2013년도에 출간해 절판되었다가 비 존슨 내한 기념으로 재인쇄하게 됐는데요. 강연 전에 책을 읽어야지 하고 주변 도서관에 알아봤는데 결국 제 차례가 돌아오지 않아 아쉬웠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아주 많이 만나네요. 책은 미리미리 구매하기!

행사 소개 팜플렛에 제로웨이스트 마켓이 함께 열린다고 적혀 있어 찾아갑니다. 많은 부스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대표적인 제로웨이스트 브랜드는 모두 있었어요. '매거진 쓸', '더 피커', '예고은', '다시쓰는 그랩', 'Gachi Soap', 'FRUTO', 'WasteUpso', 'Fresh Bubble' 등이 있었어요. 공기정화 식물도 함께 팔고 있었고, 'WasteUpso'는 포장지 없는 컨셉 스토어를 지향하듯이 일부 제품들에 한해 가져온 용기에 담아주는 행사를 하고 있었어요. 모든 부스에서 지갑을 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꽁뜨' 매대에서 핸드메이드 생리대 책을 한권 사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Fresh Bubble' 부스에서는 소프넛 사용에 대해 실용적인 조언을 얻고, 'Gachi Soap' 부스에서는 샘플 비누를 얻었습니다. 이런 셀러들이 있어 참 고맙고 다행이에요. 좋은 제품들이 더 널리 사용되기를 살포시 기대해봅니다.

그 와중에 비 존슨이 친히 제로웨이스트 마켓을 방문해주셨어요. 각 부스를 돌며 같이 사진도 찍고 판매되는 물건도 구경하고 그랬죠. 부스의 사람들 눈이 반짝였어요. 영웅을 직접 만나는 기분으로... 저 또한 어부지리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비 존슨을 만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네요.

마켓이 그리 크진 않았기에 한 바퀴 천천히 돌아도 시간이 꽤 많이 남았어요. 4층 강연장으로 이동해 출석 인증 도장 손등에 쾅 찍고 대기. 점점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2시부터 입장 시작. 강연 전까지 매거진 쓸 광고와 지상파 방송의 플라스틱 관련 다큐멘터리 클립이 상영됩니다. 일찍 강연장에 들어온 저는 내빈석 다음으로 가장 앞 자리에 앉을 수 있었어요. 

2시 30분에 식이 시작됩니다. 시작과 함께 비 존슨을 볼 수 있을거라는 기대와 달리, 제1회 서초구 세계인의 날 기념식이 먼저 시작됩니다. 국민의례와 내빈 소개, 서초구청장과 덜위치컬리지학장의 인삿말이 이어집니다. 비 존슨의 강연으로 오롯이 한 시간이 채워지길 기대했는데, 10분으로 예정되었던 개회식은 점점 더 길어지네요. 덜위치컬리지 학생들의 환경관련 메시지가 끝나자 비로소 강연이 시작됩니다. 

비 존슨은 하얀 바지에 하얀 티, 그위에 멜빵을 한 의상에 높은 굽의 샌들을 신고 나왔어요. 한 손에는 텀블러, 한 손에는 하얀 면포를 들고 무대에 섰죠. 면포 안에는 2018년 그녀의 집에서 나온 쓰레기 전부를 담은 유리병이 있었어요. 후에 소개하기를 그녀의 의상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웃들 중 한 가지 조합이고, 샌들은 얼마전 중고 시장에서 구입한 거라고 합니다.

강연 사진은 아래 한 장이 전부에요. 그녀가 요청했죠. 이 소중한 순간을 사진 찍는 데 허비하지 말고 자기 이야기에 귀 기울여 달라고. 아래 사진은 강연 시작 직전 무대 세팅을 점검하는 비 존슨이랍니다.

강연 내용은 책의 축약 버전입니다. 책에서 강조했던 5R(Refuse, Reduce, Reuse, Recycle, Rot)을 실제 경험담과 함께 재미있게 소개합니다. 그녀의 외모 콤플렉스인 얇은 입술을 보완하기 위한 플라스틱 없는 화장품으로 쐐기풀류를 직접 입술에 발라 본 이야기, 화장지 대신 이끼류를 모아 사용하려 했던 이야기, 식초로 머리를 헹구는 노푸 생활을 6개월 정도 하다가 남편이 더 이상 냄새를 못참겠다하여 그만 두게 된 이야기 등 현재의 그녀가 있기까지 그녀가 겪었던 엉뚱한 듯한 경험담이 청중들을 즐겁게 합니다. 

주방에서, 침실에서, 아이들방에서, 옷방에서, 창고에서 What If(만약에)를 염두에 두고 남겼던 물건들을 과감히 포기하니 쓸레기가 줄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질도 유쾌해졌다고 말합니다. 공간에 돌보던 시간과 노력을 가족과 취미, 추억에 투자하게 됐다는 얘기도 했죠. 또한 그녀는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유연함'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유연함이란 실천에는 단 한가지만의 해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의 유연함입니다.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버터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는 것은 좋은 경험이긴 하나 오히려 생활을 낭비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하죠. 노동의 고통을 줄이고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바로 유연함이죠. 이는 제로웨이스트 이슈와 관련해 상대방과의 대화에서도 발현됩니다. 환경과 실천에 대해 각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어요. 이견을 존중하되 본인만의 신조를 유지하는 것, 이것도 바람직한 유연함이라 할 수 있죠.

강연 내내 그녀의 프랑스 악센트가 섞인 유머에 함께 웃다가, 핵심내용에 대해서는 같이 진지해졌죠. 그녀는 깐깐했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녀의 미소는 많은 것을 경험해 본 사람만 보일 수 있는 거였죠. 직접 청중의 질문에 답하는 Q&A 시간에 그녀는 더욱 돋보였습니다. 누군가 학교에서의 제로웨이스트 교육 방법에 대해 물었어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죠. "제로웨이스트 실천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가와 별개로 어른들의 행동은 그런 교육과 이질적일 때가 많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는 가를 논의하기 전에 어른이 먼저 실천해야 한다(의역한 것이라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제 고민 중 하나인 학용품에 대한 조언도 있었습니다. 매 학기 구매해야 하는 학용품 리스트가 많은데, 이 학용품들은 1년만 사용되고 버려집니다. 어른들은 아주 쉽게 매장에서 플라스틱 제품을 사고, 다음 해에 또 사죠. 매년 준비해야 할 학용품이 같다면 1학년 때부터 교육기간 내내 사용할 수 있는 학용품을 사도록 학교에서 유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클리어파일의 경우 튼튼한 종이로 끼워 쓸 수 있거나 금속으로 된 제품도 있거든요. 저 또한 아이의 유치원 3년 내내 준비해야 했던 싸인펜과 크레파스, 색연필 등이 모두 플라스틱 재질이라 마음이 몹시 불편했던 기억이 있어 매우 공감했습니다.

그녀는 본인의 제로웨이스트 홈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된 이유 중 하나가 '환경'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환경보호'라는 키워드에 노출되었고, 이 시대에 '환경'은 하나의 클리셰가 되어버렸죠. 비 존슨은 본인의 강연에서 '환경'이라는 단어는 두 번 정도밖에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요. 가족과의 행복, 건강함, 삶의 질 상승 등의 측면에서 제로웨이스트를 이야기 했기 때문에 더 많은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어쩜 이렇게 멋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의 확고한 실천을 만들기 위해서 수십번, 수백번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그녀의 노고를 존경합니다. 그간의 실천들을 5R과 라이프스타일 측면에서 요약 설명할 수 있다는 건 반복적인 경험과 엄청난 시행착오, 강한 의지가 아니면 실현되기 힘들었을거에요.

이렇게 본 행사가 끝나고 1층 사인회 현장으로 갑니다. 제가 좀 눈치가 빠른 편이어서 이 곳에서 하겠거니 하고 서있는데 어느새 그게 줄이 되어버렸어요. 어떨결에 가장 처음으로 비 존슨의 사인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비 존슨의 멋짐이 부각되는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주최측은 여느 사인회와 마찬가지로 싸인용 네임펜을 준비해 놓았어요. 비 존슨은 자신이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재사용 가능한 펜을 꺼내며 그 일회용 펜을 사양했지요.

전 책 두 권을 준비했어요. 하나는 개인 소장용으로, 하나는 아파트 내 도서관에 기증할 마음에서였죠. 각 책에 'to' 다음 뭐라 적어달라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두 권의 책을 내미는 순간 비 존슨은 이렇게 말했어요. "전 제 책이 보관용이 되길 원하지 않고 함께 나누길 바란다. 그래서 개인 이름을 사인에 넣지 않는다". 제가 참 생각이 짧았던 것을 느꼈죠. 그녀는 제 이름 대신에 함께 나누자는 메시지를 적어줬어요. 강연 끝나고까지 절 감동시키네요.

그녀는 쓰레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실천하였고, 그렇게 비우는 동안 행복을 얻었죠. 이 강연은 제로웨이스트라는 행보에 발을 들인 지 이제 막 1년이 되어가는 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유연성'이란 키워드는 해법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조금씩 지쳐가는 저에게 위로를 주었고, '나눔'이란 키워드는 앞으로 실천해가는 참 좋은 아이디어가 되었죠.

고마워요, 비 존슨! 살아있는 영감이 되어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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